역사는 왜 알아야 할까요? 한국은 수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인만큼 역사를 공부하려면 그 양이 너무나 방대합니다. 가끔은 굳이 지나간 걸 지금 또 알아야 하는지 의문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발전해도 전쟁은 여전히 발생합니다. 과거에 빗대어 현재를 볼 때 분명 반면교사 삼을 부분이 많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한반도 역사의 패턴을 알게 된다면, 평화를 지키기 위해 위기상황에 미리 대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할 책은 조선 시대의 재상이 후손들에게 전할 전쟁의 참상과 반성에 대한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바에 대한 것입니다. 또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조선의 재상으로서, 전쟁의 모든 것을 기록하여 다시는 이러한 일이 반복되질 않길 기원하는 바람에서 기록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 기록은 오늘날 징비록(懲毖錄)으로 불립니다(국보 제 132호 이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경계해 뒤에 환난이 없도록 삼가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해당 도서는 임진왜란 스토리를 자세하게 배우고 싶은 분들, 리더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싶은한 분들 그리고 기록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알고 싶은 분들께 추천합니다(밀리의 서재 추천).
100년의 평화와 엇갈린 보고
1592년 4월 13일 왜적이 부산포에 나타나기 이전 약 200여 년 동안, 조선은 평화의 시대를 누려왔습니다. 그만큼 전쟁 대비를 철저히 하진 않았습니다. 반면 일본은 전국시대를 맞아 100여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전쟁을 치러왔었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 사람으로부터 조총을 구매하는 등 신식 기술로 무장해 왔습니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권력을 잡고, 수많은 전투 경험을 가진 군사들을 통해 조선 정벌 계획을 세웠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왕위를 잡자마자 조선에게 서로에게 사신을 보낼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했습니다. 이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하나의 준비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도 통신사(조선시대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장군에게 보낸 공식적인 외교사절)로 황윤길과 김성일을 보냈습니다. 히데요시를 만나고 온 뒤 두 사람은 서로 정반대의 보고를 임금에게 올립니다. 황윤길은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김성일은 그런 기색을 느끼지 못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 둘의 의견 중 결국 김성일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정쟁은 치열했습니다(이름하여 붕당정치). 임진왜란 직전에는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이라는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황윤길은 서인 그리고 김성일은 동인 세력에 속했습니다. 임금에게 통신사로서 보고를 올릴 때 동인 세력이 더욱 우세하였고, 그 때문에 김성일의 의견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렇다고 왜적의 침략에 대해 손 놓진 않았습니다. 다만, 침략을 막기에는 태부족이었습니다. 초당적 합의를 이루는 미국 의회처럼 위기의 순간에는 하나가 되어 더 철저히 준비했었더라면, 더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도망간 임금, 싸우는 의병
부산포로 처음 침공한 왜군은 단 20여 일 만에 수도 한양을 점령합니다. 몇 몇 장수들은 끝까지 싸웠으나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그 외 무능력한 장수들과 오합지졸 군대들 또한 전사하거나 도망쳤습니다. 철저히 준비하지 않은 채 전투에 임하다 보니 속수무책으로 조선의 군대는 패배했습니다. 거기에 선조는 북방 지역으로 피신해 버립니다. 리더의 무능력이 국가의 존망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무능력한 리더들로 인해 나라의 운명이 기울었던 순간, 한 줄기의 희망은 바로 백성들이었습니다. 도망간 임금을 보고 분노한 백성들은 의병(義兵)으로 변신하여 나라를 위해 싸웠습니다. 길주 정문부, 묘향산 서산대사, 평양 임중량, 청주 조헌, 광주 김덕령, 의령 곽재우, 담양 고경명, 합천 정인홍 그리고 금강산 유정(승려) 등 많은 의병장들이 등장했습니다. 특히 유정은 승려로 승군(僧軍)을 일으킨 공신입니다. 산속에 혼자 남아서 제자리에 있는데도 오히려 왜적들이 합장하며 예의 갖추고 돌아섰다고 합니다(아우라). 그는 1,000여 명의 승군을 일으켜 관군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했습니다. 전후에는 일본에 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 家康)를 만나 임진왜란 때 잡혀간 3,5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귀국했습니다. 뛰어난 리더와 백성들이 힘을 합했더라면 억울한 희생을 더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후손들을 위한 기록
우리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참상을 낱낱이 알 수 있었던 것은 서애 류성룡의 기록 덕분입니다. 그는 전쟁의 참상과 조정의 잘못을 후대들이 볼 수 있도록 모두 기록했습니다(본인의 업적을 어필한 부분도 존재합니다). 기록 중의 많은 부분이 피해 입은 백성에 대한 묘사입니다. 굶어 죽어 성벽처럼 쌓아진 시신과 역병으로 죽은 말들에게서 나는 냄새들. 그야말로 무간지옥입니다. 글로만 보아도 그 참상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를 이 지경까지 만든 조정과 자신의 잘못을 류성룡은 계속하여 언급합니다.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원망도 함께 표현합니다.
그는 반성의 기록과 함께 전쟁 중에도 상황을 타개할 계책들을 지속적으로 임금께 상소합니다. 크게 전세를 역전시킬만한 효과는 없었으나 당시 어떠한 상황이었고, 어떠한 사유로 계책을 내었는지 상세하게 나와있습니다. 시대가 지난 지금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된다면 참고해 볼 만한 역사적 기록입니다.
지금도 세계 어딘가에서 전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또한 북한과 여전히 휴전 중입니다. 이럴 때 일 수록 어떠한 배경에서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생했었는지 다시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기록이 있으니까요. 통탄한 마음으로 후손들에게 남긴 류성룡의 기록을 우리나라의 리더들이 다시 한번 곱씹어 봤으면 합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경계해 뒤에 환난이 없도록 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역사는 반복되기에,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밝은 미래를 향한 답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의 역사가 이 땅에서 다시 반복되지 않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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